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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없는 家
유길준 본문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906
생각컨데 만약 내가 유길준이 태어난 시대에 태어나 같은 입장이었더라면 똑같이 했을 것 같다. 너무도 공감이 가고, 이해되는 분이다. 인생이 감동이다.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19세기 말 조선의 누구보다 외국사정에 밝은 인물이었다. 그는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국비로 유학을 하였으며 유럽과 동남아
등을 두루 돌아본 국제통이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19세기 말, 대혼란의 시기에 정작 그는 오랜 유폐와 망명, 그리고 스스로 삼가는 태도 등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뜻을 펼칠 장을 그다지 얻지 못했다. 그는 정치 일선에 있기 보다는 배후에 있었다. [서유견문]이라는 최초의 국한문 혼용의 서양견문록 및
경세관이 담긴 책을 쓴 유길준은 행동하는 개혁가라기보다는 사상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최초의 국비 유학생
유길준은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세거하던 기계 유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유진수와 외할아버지 이경직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의
외할아버지 이경직은 고위관료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재력가로 서울 북촌에 거주하며 당시 집권층이던 노론들과 돈독한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청소년 시기 유길준은 외할아버지의 주선으로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그는 청나라
위원이 쓴 세계지리서 [해국도지] 등 개화와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세계정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개화에 뜻을 두게 된
유길준은 과거제도가 나라를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유길준은 훗날 급진개화파로 변신하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과도 친분을 가지게 되었지만, 박규수 사후에는 실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강위의 문하에 들어가 김윤식 등과 어울리면서 유대치의 지도를
받은 급진 개화파와는 그 노선을 달리하게 되었다.
한편, 이즈음 조선정부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근대문물의 유입에 큰 충격을 받고 이를 적극 수용, 배워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짧은 기간에
걸친 일본의 놀라운 변화에 주목한 조선정부는 이를 시찰하는 조사 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일명 신사유람단이다. 조사 시찰단은
정부의 공식적인 파견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명목상으로는 개인적인 일본 시찰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는데, 이때 파견된 사람들은 대부분 2~30대의 젊은
층이었다. 유길준은 조사 시찰단의 단장이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조사 시찰단은 4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각지를 여행하고 정계
및 학계의 인사들과 교유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유길준은 이때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체류 중에 친분을 맺은 일본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학교 게이오 의숙에 머물면서 유학하였다.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의 저작물을 보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런 책들을 써
조선인들을 계몽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1882년 제물포조약(임오군란으로 일본과 맺은 조약)의 실무이행을 위해 일본에 건너온 박영효와 재회한 유길준은 사절단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고 1년간의
유학생활을 접고 박영효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유길준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를 지냈으며,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 발간을 도모하였으나
박영효의 좌천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 조약을 맺은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격심해진 청나라의 간섭을 막기 위해 서방세계에 보빙사라는 이름의 친선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정사는 민영익이었고 부사는 홍영식이었다. 보빙사는 미국을 시작으로 하여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는데. 유길준도 보빙사 사절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유길준은 정사인 민영익의 허락하에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대학 진학을 준비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친분을 맺은 생물학자 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
지도를 받고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대학 진학 예비 학교였다. 학비는 조선 정부에서 대서 유길준은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유길준의 학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1884년 갑신정변의 여파로 고종은 개화파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수구파였던 민씨척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유길준에게 오던 유학비용도 끊어졌다.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유길준은 미국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바로 조선으로 돌아오지는 않고 유럽을 돌아
견문을 넓히고 동남아시아, 일본을 거쳐 마침내 1885년 12월 인천에 도착하였다.
7년간의 연금과 [서유견문] 집필
조선에 귀국한 유길준은 김옥균, 박영효 등 갑신정변의 주모자들과의 친분으로 인해 바로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감금되었다가 이후
가회동 취운정으로 옮겨 1892년까지 7년간 연금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이 기간에 유길준은 유학생활과 유럽탐방기, 그리고 자신의 경세관을 담은 책
[서유견문]을 집필하였다.
[서유견문]은 국한문 혼용체로 서술되었는데 이는 한문으로 대표되는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한글을 부흥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읽히도록 하겠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서유견문]에서 유길준은 서양의 근대 문명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가진 개화사상을 피력하였다.
유길준의 개화사상은 급진 개화파와는 그 노선이 달랐다. 어렸을 때 조부로부터 배운 한학의 영향과 서구문명을 접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그의
개화사상은 조선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 개화였다. 그는 개화를 실상개화와 허명개화 두 가지로 나누었다. 그는 허명개화는 남의 것을 무조건 모방해서
개화하려는 것으로 이는 재물만 소비할 뿐이고 실상개화는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살펴서 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좋은 점은
남기고 해로운 부분은 서구의 문명을 새로 받아들여 조선실정에 맞게 고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입헌군주제의 도입과 근대적인 세제 개혁과
화폐의 통용, 무역의 진흥, 교육제도의 개편 등을 조선에서 시행해야 할 개화의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개화이론은 이후 그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갑오내각에 참가하면서 그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서유견문]은 1889년 완성되었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발간되지 못하다가, 그가 연금에서 풀려나고 갑오개혁을 거친 후 1895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일본의 출판사 [교순사]에서 간행되었다.
정치참여와 을미사변과의 관련성
연금에서 풀려난 뒤 2년 후, 1894년 유길준은 청일전쟁 와중에 세워진 김홍집을 수상으로 한 갑오내각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저술 [서유견문]에서
주장한 바를 갑오경장에 이론적 근거로 제공하였다. 이때 유길준은 민씨척족세력과 대립하여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과 함께 대원군의 편을 들었다. 이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수립된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서도 유길준은 여전히 이러한 태도를 취하였다.
당시 고종과 민씨 척족세력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막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에, 삼국간섭으로 랴우둥 반도에 대한
권리도 잃고, 러시아의 개입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도 축소되어가자 국면전환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참담하게도 일본 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이 터지고야 만다. 유길준은 을미사변 직후, 일시적으로 수립된 을미 내각에서 내부대신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을미사변 수습을
명목으로 일본 측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유길준 본인은 그의 스승인 미국인 모스에게 보낸 편지에 을미사변의 한국 측 배후세력을 대원군으로 쓰고 있는데 윤치호는 유길준도 이 을미사변에 어느
정도는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만큼 유길준은 자신이 가진 개화의 뜻을 펼 수 없게 만드는 민씨 세력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을미 내각에서 정권을 잡은 유길준은 자신이 뜻한 바대로 개혁을 밀고 나가기 위해 단발령을 내려 전 국민적으로 반감을 샀다. 실제로 그는 단발령 시행 이후
고종과 왕세자의 단발식에 훗날 순종이 되는 왕세자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기도 하였고, 단발령에 반대하는 최익현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을미 내각의 친일적 성향과 점점 더 심하게 간섭해오는 일본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은 1897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떠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아관파천 직후 고종은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등을 을미사변의 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명령을 내렸다. 이 일로 김홍집 등은 살해당하고 유길준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00년 유길준은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과 함께 의친왕을 왕으로 옹립하는 역모를 획책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일은 국제 분쟁으로 비화되어 유길준은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섬에 4년간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을사늑약 후의 행보
유길준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전과는 제법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는 기울어가는 나라에 대한 회환으로 기독교에 귀의했고 1907년 고종이
헤이그특사사건으로 폐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일본에서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는 일본 총리대신에게 정미 7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고
일본 신문에도 특별기고를 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결국, 고종은 퇴위하고 국권의 많은 부분이 일본에 양도되고 말았지만 유길준의 이러한 활동을 전해 들은
순종은 그를 불러들였다.
귀국한 유길준은 국민 모두를 선비로 만들겠다는 국민 개사(國民皆士)의 뜻을 품고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는 등 교육사업을 벌이고 한성부민회를 설치하여
지방자치제를 시도해보기도 하였다. 또한, 계산학교·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해 국민 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호남철도회사·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해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도 허무하게 1910년 일본은 우리나라의 국권을 피탈하고 말았다.
1910년 이후, 유길준은 나라를 잃은 자괴감에 칩거하였으며, 일본에서 주는 남작지위를 끝내 받지 않았고 1914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은 평생 아무런
공도 이룬 것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